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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농민, 여성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13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 한다’ - 제80회 순국선열의 날 독립유공자 포상 -

서하면 故 전재식全㦳植 선생 장손 전순익 전 재경서하면향우회장 대통령표창 수상
박동실서울지사장 기자 / dongsilp@hanmail.net입력 : 2019년 11월 22일
단기4352년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오는 17일(일) ‘제8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은 김희식(金熙植) 선생 등 13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1명(애국장 7, 애족장 24), 건국포장 9명, 대통령표창 96명으로,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한 분(지익표, 95세)이며, 여성이 28명이다.
ⓒ hy인산인터넷신문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80회 순국선열의 날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본인과 유족에게 수여된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1,045명, 건국포장 1,317명, 대통령표창 3,463명 등 총 15,825명(여성 472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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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보훈처는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 관련기관과 사료수집 협업체제를 강화하고, 국내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데 더욱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제80회 순국선열의 날’ 맞아 주요 포상자의 공적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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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무단통치의 폭압에 항거한 평범한 농민, ‘김희식 선생’
3․1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중형을 받은 김희식(金熙植)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무학(無學)의 평범한 농민으로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 원곡면사무소 앞 등지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의 중형을 받고 큰 고초를 겪었다. 1919년 4월 1일 선생은 1,000여 명의 면민과 함께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인근 양성면사무소와 양성면 경관주재소 등을 공격․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일제 행형자료는 선생이 “주재소에 침입하여 비치된 기구를 파훼(破毁)하였다”(예심종결결정, 1920.3.22.)고 적시하였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0.8.10.)과 「형사공소사건부」,「신분장지문원지」 등의 자료에서 활동내용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무단통치로 일컬어지는 1910년대 일제의 폭압에 가장 격렬하게 투쟁하다 만세운동 사건으로는 이례적이라 할 중형을 받은 사례이다. 독립만세운동 당시 전국적으로도 격렬한 항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경기도 안성시에서 포상을 신청한 것으로, 독립유공자 포상에 지방자치단체와 국가보훈처가 협업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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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만세를 부르다 사망한 동지의 운구행렬에 참여하여 고초를 겪은 ‘이만용 선생’
3․1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태 70도를 받고 고초를 치른 이만용(李萬用)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4월 5일 충남 청양군 정산시장 장날에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태 70도를 받았다. 당초 정산시장 만세시위는 1백여 명의 장꾼들이 시작하였다가 일제 헌병이 30여 명을 연행하자 7백여 명으로 불어나고 헌병이 이에 발포하여 향교직원 권흥규(權興圭, 1990 애족장)가 사망하는 등 사상자가 발생함으로써 격렬한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이튿날 선생은 1천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권흥규 선생의 운구행렬에도 참여하였다가, 청양 헌병분견소에 끌려가 태 70도를 받았다. 안타깝게도 선생이 태형을 받은 지 불과 4년 뒤인 1923년 9월 30대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에서 일제의 악형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번에 충남 청양군에서 선생을 포함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태 70도를 받은 29명에게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선생 등에 대한 포상은 일제의 이른바 「범죄인명부」등에서 공적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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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 후원한 ‘통합’ 대한애국부인회의 기독교 신여성, ‘최영보 선생’
평남 평양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여성 독립운동가 최영보(崔永保)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11월 평남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할 목적으로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지원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주목되는 것은 대한애국부인회가 3․1운동 직후 조선독립의 목적 달성을 위해 평양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장로파와 감리파의 통합으로 결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통합을 바탕으로 대한애국부인회는 단기간에 2,400여 원이라는 거금을 임시정부에 보낼 수 있었고 그 여세를 몰아 평남 일대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지회조직 결성을 추진하였다. 당시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 진남포 기독교 장로파 지회장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경남 마산의 기독교계 사립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기독교 여성으로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례이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신분장지문원지」,「동아일보」,「매일신보」,「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등에서 공적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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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과 투쟁으로 불꽃처럼 살다 간 여성 독립운동가, ‘송계월 선생’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에 참가, 세 차례나 투옥된 여성 독립운동가 송계월(宋桂月) 선생께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2년 함남 북청 출신으로, 1928년 5월 경성여자상업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에 참여하다 체포되었고, 1930년 1월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 지지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으며, 이듬해 6월에는 경성여자상업학교 졸업생 신분으로 모교의 동맹휴학을 선동한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다. 특히 1930년 1월 광주학생운동 지지시위 당시 선생은 자신의 하숙집을 서울지역 여학교 대표들의 밀의장소로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본인은 여학교 간 연락을 맡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연락을 전담함으로써 서울지역 시위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졸업 후 ‘문예방면’을 꿈꾸던 선생은 1933년 5월 31일 요양 중이던 함남 북청의 자택에서 2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당시 신문은 “양(孃)은 여자상업학교 출신으로 일시는 상점의 점원이 된 일도 있었으나, 타고난 재질은 문예방면에 있어 드디어 잡지계로 방향을 전환하여 개벽사 기자로 지금까지 내려왔고, 한편으로 소설의 창작을 시험하여 문단으로부터 상당한 인정을 받았다”(동아일보, 1933.6.2.)고 하며 선생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동아일보」,「매일신보」,「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등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활동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 중국에서 임시정부 지원에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가, ‘강영파 선생’
중국 상해와 중경 등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단체 등에서 활동하며 임시정부 지원에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가 강영파(姜英波)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30년 8월 중국 상해에서 상해여자청년회 창립대회 주비위원(籌備委員) 및 임시위원으로 활동하고 1932년 4월 동 회의 총무부장으로 활동했다.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동한 뒤 1942년 한국애국부인회가 재건되자 재무부 주임을 맡았으며 1944년 3월에는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독립당 당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선생은 한국광복군사령부 군의처장으로 활약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유진동(劉振東) 선생(2007년 애국장)의 부인이기도 하다.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1930년대부터 광복 때까지 상해와 중경 등지에서 임시정부 지원과 독립을 위한 선전활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한 사례이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외무성경찰사」등 일제당국의 정보문서와 「신한민보」등에서 독립운동 공적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2019년 11월 17일 제80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경기남부보훈지청)에서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고 전재식 선생 손자인 전 재경서하면향우회 전순익 회장이 대통령 표창을 전수 받았다.

고故 전재식 선생은 1898년 서하면 송계리 출생으로, 고려말 두문동 72현 중 한 분인 절의충신節義忠臣 채미헌 전오륜全五倫의 18세손이며 조선왕조 순조실록에 등재된 충신인 사미당 전우석全虞錫의 8세손이다. 조부(全孝鎭)는 고종조 중추원 의관議官, 부친(全永國))은 안의향교 장의掌議를 담당하는 등 대대로 내려오는 유학자 집안 출신이다.

1919년 3.1 기미독립만세 당시 지곡면 주암 숭양정崇陽亭(교관, 유학자 죽헌 정태현)에서 매형 정순완, 친족 전병창 등과 한문 수학을 하다가 전국 및 인근 함양, 거창 독립만세 시위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당시 보산리 정취마을 급천서당 한문교사 추범 권도용 선생이 작성한 조선독립선언서 등 항일독립 문건을 접하고 급천서당 생도 김채호, 안의 금천리 최석룡 및 숭양정 수학 동문들을 비롯한 여러 동지를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비밀리에 안의 장날 거사를 치밀하게 모의하고 준비하였다.

거사 직전인 3월 25일 수동면의 고재경, 정규환, 정재원 등의 거사가 사전 탄로가 나서 일본 헌병대의 경계가 더욱 심한 상황에서도 동지들을 규합하여 3월 31일 안의 장날 모여든 수백명의 군중 앞에 나선 선생은 준비한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 산포하고, 전병창, 정순완, 임채상, 조제헌 등 주동자들과 준비한 구 한국태극기와 소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고창하는 등 독립만세를 주도하였고, 관아를 습격할 즈음 선생을 포함한 주동 5인은 출동한 거창 헌병수비대에 체포되어 진주로 이송,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죄로 판결을 받고 진주형무소에서 모진 고문과 많은 옥고를 치르고 나와 그 후유증으로 인한 깊은 병환으로 대외적인 활동을 거의 중단한 채 평생을 고생하다가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해방을 보지 못한 채 해방 2개월전인 1945년 6월, 4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후손으로는 외동아들 전병희(1992년 작고)와 손자 전순익(전 외환은행 본점 부장), 건익(전 ㈜옵테론 전무), 성익(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 문익(미술학원 원장), 오익(㈜현대자동차 본부장), 창익(특허청 서기관) 등 6명이 있다.

더불어, 금년 광복절에는 전순익 회장의 적극적인 조력을 받아 당시 같이 활동한 고 정순완 선생, 고 전병창 선생이 대통령 표창을 받은 바 있고, 고 조경제 선생도 그 유족의 오랜시간 부단한 노력으로 대통령 표창(2019.8.26.자 함양신문 6면 기사)을 받은 바 있다.

이로써 안의만세관련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사람은 고 김동호 선생(1990년 애족장)을 비롯하여 금년 선생을 포함한 대통령표창 4명 등 총 5명에 이르고 있다.


박동실서울지사장 기자 / dongsilp@hanmail.net입력 : 2019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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