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26-04-18 11:26:47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 원격
뉴스 > 동영상뉴스

【1179주기】 문창후 고운최치원선생 향례

최치원상림공원 인공림을 조성하여 함양의 물길을 돌린 분
신라 3최로 불리던 천재학자

김윤국 기자 / 입력 : 2026년 04월 17일
ⓒ hy인산인터넷신문

단기4357년

천령군태수로 부임하여 시내를 흐르는 위천수의 물길을 지금의 자리로 돌리고 제방에 인공림을 조성하여 수해로부터 천령고을을 구해내신 최치원선생님을 기리는 춘향례가 2026년 4월 15일 오전 11시부터 최치원상림공원이 내려다 보이는 최치원역사공원 고운기념관에서 최씨종중과 군민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hy인산인터넷신문
ⓒ hy인산인터넷신문
ⓒ hy인산인터넷신문

이날 고운기념관에서 11부터 열린 춘향례에서 진병영군수가 초헌관으로
고운선생의 초상화를 열고 관수세수후 강신례, 참신례, 헌작하고
임정택대축이 축문낭독을 하였다.
ⓒ hy인산인터넷신문
ⓒ hy인산인터넷신문

계속해서 최광일경주최씨중앙종친회청년회장이 헌작.재배하는 아헌례를 올리고,
이종훈성균관유도회안의지부장이 헌작.재배하는 종헌례를 올리고, 제주와 안주를 먹는음복례,
축문과 폐비를 태우는 분축례를 하였다.
ⓒ hy인산인터넷신문
ⓒ hy인산인터넷신문

이어서 진병영군수는 “최치원 선생께서 설파하신 풍류 정신과
유·불·선의 융합 사상은 오늘날 우리 지역이 지녀야 할 문화적 뿌리이며 자긍심”이라 했고,
김윤수추모위원장도 "최치원선생님의 문창후라는 시호는 단순히 문장가라는 뜻이 아니고
한 나라의 제후로 봉해진다는 뜻이 있는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크다면서 상림공원의 이름도
단순히 상림공원이 아니라 최치원상림공원이나, 문창후상림공원등 고운선생님을 기릴수
있는 이름으로 지었으면 좋겠다."라고 했으며, 종친회장등의 강평례 순으로 진행되었다.

ⓒ hy인산인터넷신문
ⓒ hy인산인터넷신문

최치원은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신라삼최 중 하나로, 한국 유학과 문학에 큰 족적을 남겨 고려 시대, 조선 시대까지 숭앙되었다.
ⓒ hy인산인터넷신문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중시조다. 최씨의 시조는 신라 건국기의 인물 소벌도리지만, 사실상의 시조는 최치원으로 여긴다. 다른 최씨의 시조도 경주 최씨에 비롯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대한민국의 대부분 최씨의 중시조라 할 수 있다.
뛰어난 천재로서 신분의 벽을 넘기 위해 해외 유학을 가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을 실현한 후 나라를 살리기 위해 돌아왔지만 다시 한 번 신분의 벽에 막혀 좌절한 사람의 대표격으로 알려져 있다. 드라마틱한 인생 때문인지 그를 신격화하여 주인공으로 한 《최고운전》이라는 고전소설이 있다.

문성왕 19년(857년) 통일신라의 사량부(沙梁部)에서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태어났다.[20] 아버지 최견일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원성왕의 원찰 숭복사(崇福寺) 창건에 참여했다는 행적이 전한다.
ⓒ hy인산인터넷신문

친형 현준(賢俊)이 있었으나 출가해 해인사로 갔기 때문에 집안의 사실상의 장남인 최치원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다 12살 때인 868년 당나라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당시 신라에서는 837년 한 해에만 216명이 당나라에 유학생으로 떠났을 만큼 당나라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고, 당나라 유학 경력이 있으면 신라에 돌아와서도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 코스였기 때문이다. 떠나는 배 위에서 아버지에게 "10년 안에 과거급제 못하면 어디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도 마라. 나도 아들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겠다" 라는 말을 듣게 된다.[23] 최치원은 "남이 백의 노력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던 듯하다. 당초 10년 기약을 4년 단축하여 6년[24]만에 18세 나이[25]로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했다.
ⓒ hy인산인터넷신문

종종 최치원이 합격한 것이 중국인들과 함께 경쟁하는 진사과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의 진사는 과거시험의 최종합격자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중앙관서로 올라가지, 장원급제자를 2년 후에야 현위에 임명하지는 않는다. 등과기고에도 언급되는 것처럼 이전의 경쟁상대를 발해인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최치원이 합격한 것은 외국인 대상시험으로 치러지는 빈공과가 맞다.

24세 나이인 880년, 당시 당나라를 어지럽히던 황소의 난 토벌을 고병이 맡게 되자 최치원도 함께 참전하였다. 이러한 고병의 덕으로 최치원은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의 직책을 받아 4년간 종군했으며,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거나 과장해서 아예 굴러 떨어져서 죽었다는 것으로 유명한 토황소격문[32]을 쓴 것도 881년의 일이다. 그러나 토황소격문은 중국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소설인 최고운전과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통감에만 나온다. 포상으로 882년 비은어대를 받고 이어서 다시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최치원이 임명된 도통순관은 토벌군이 편성되는 과정에서 군 내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내렸던 명예직으로 이런저런 글을 열심히 썼다지만 실권은 전혀 없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최치원은 당나라의 기록에 고병의 문객으로만 기록에 남아있을 뿐이다.[33] 다만,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치원 찬(致遠 撰)’이라고 하여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 hy인산인터넷신문

최치원이 문객으로 의탁한 고병은 도교에 심취해서 나중에 그 때문에 군무마저 내팽개쳤다가 내부 반발로 살해당한 인물이었다. 최치원은 한국 도교사에서 비조로 꼽히는데, 이 고병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라는 추정도 존재한다.[34]

최치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토황소격문이 이 시기에 고병의 이름으로 나왔지만, 그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길은 없다. 그리고 당 내부에서 최치원의 유명세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현대 유명 정치인들의 연설문이나 자서전의 상당수에 대필작가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를 통해서 알려지는 것은 이름을 건 유명인이지 대필작가가 아니다. 최치원이 바로 그 대필작가였던 것이다.
ⓒ hy인산인터넷신문

오히려 고병은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데 관할지인 양주에 머무르기만 하고 정작 수도 장안을 점령한 황소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로 반란의 의심을 받아서 882년 파직당했다. 최치원과 관련해서 고병이 황소의 난을 토벌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황소의 난을 제압한 것은 사타족인 이극용 등의 활약이 지대했지 고병은 활약이 별로 없었다. 이후에도 고병은 양주에 머무르면서 거의 반 독립군벌처럼 움직였으며, 최치원이 나중에 신라로 귀국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부 반발로 살해당했다. 고병이 파직된 882년과 최치원이 귀국하는 885년 간의 3년간의 행적은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 882년에 자금어대를 받았으며 이후 당나라 황제의 서신을 가지고 귀국하였기 때문에 이때 할거한 고병을 이탈한 것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어찌되었든 당시 당나라는 이미 혼란기로 접어든 상태였고, 최치원이 의탁하고 있던 고병은 실권하고 도교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마침 884년 당나라를 방문한 친척 최서원으로부터 오랫동안 궁금했던 집안 사정을 들었고, 결국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있어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최치원은 신라로 귀국해버렸다. 당시의 신라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는 자체 관리등용 시험은 있었지만 그보다는 당나라 유학 경력을 상당히 우대해주는 편이었던 덕분에[35] 빈공과 합격 후 나름대로 공직 경력도 있는 최치원 정도면 신라에서 출세는 거의 보장된 상태였다.
ⓒ hy인산인터넷신문

결국 신라와 당나라 모두에서 맞이한 난세 속에서 자신 같은 인재가 쓰일 데가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최치원은 동사강목에 의하면 898년 무렵에 면직되어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49] 그보다 전인 897년 1월에는 하정사 김영과 함께 당나라에 마지막으로 사신으로 갔다오는데, 이미 견훤이 왕을 자칭한 게 892년이므로 897년경이면 서라벌에서 당나라까지 가는 길에서 그 혼란상을 제대로 둘러봤을 것이고 정계 은퇴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조선 말에 편찬된 동사강목에서는 최치원이 스스로 신라 정계에서 은퇴한 게 아니라, 신라 입장에선 지방 반란군인 왕건을 지지했다가 파직당해서 가야산 해인사로 갔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 아래 왕건을 지지했는가 단락 참조.

《삼국사기》에 의하면 은퇴한 이후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지리산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으며, 고려 이인로의 《파한집》에 의하면 그가 머물던 집에 신발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 그의 흔적만 사라졌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후대에는 최치원이 가야산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광범위하게 생겨났다. 은퇴 후 전국을 유람해서 남산(경주), 합천의 빙산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부산 해운대, 창원의 월영대 등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해운대의 경우는 자신의 호인 해운(海雲)을 동백섬 바위에 새겨 그것이 지금까지 지명으로 이어진다. 월영대가 있는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해운동도 같은 해운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구 산복도로의 이름도 최치원의 별호인 고운(孤雲)에서 따서 정식 이름은 고운로다. 금강산에도 외금강 구룡폭포가 올려다보이는 바위에 '천장백련 만곡진주(千丈白練 萬斛眞珠, 천 길 흰 비단 드리웠는가, 만 섬 진주알을 흩뿌렸는가)'라는 최치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이후 고려~조선시대까지 근 1천 년간 문인들의 금강산 순례 붐이 일었고, 산 바위에 자기들의 문장을 새기는 것이 유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실제로 가장 오래된 글씨가 이 최치원의 것이기 때문이다.[50]
ⓒ hy인산인터넷신문

일단 900년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벽기, 901년 석순응전과 석이정전, 904년 해인사 화엄선원에 은거하면서 법장화상전[51][52], 부석존자전 등을 집필한다. 이 가운데 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를 제외하면 모두 한국에는 전해지지 않고, 법장화상전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에도 시대에 승려들이 편집한 것이 다이쇼 신수대장경에 실렸고[53] 한국에는 동국대학교 김복순 교수가 발견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석순응전과 석이정전은 대가야 왕실의 후손으로서 해인사의 개창조로 알려진 순응과 이정 두 승려의 생애를 다룬 것이고, 부석존자전은 부석사의 개창조인 의상대사의 전기로,[54] 전자의 두 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일부 인용되어 있어서 조선 중기까지는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부석존자전도 삼국유사에 일부 인용되어 있을 뿐이다. 이 밖에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의 승려로 백제로 망명해 열반종의 개조가 되었다는 보덕화상의 전기도 최치원이 집필했었다고 전하고 있다.

최치원이 쓴 글 가운데 연대가 밝혀진 것 중 가장 마지막으로 지어진 것이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君護國城八角燈樓記)로, 908년에 지어졌으며 수창군[55]의 호족 이재가 부처의 힘으로 국가의 위기를 타개해 줄 것을 빌며 지은 팔각등루의 연원을 적은 기록이다. 이 기록의 내용은 이재를 신라의 충신으로 칭송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최치원이 말년까지 견훤이나 궁예 같은 반국가세력에 가담하기보단 신라의 충신으로서 끝까지 남으려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 hy인산인터넷신문

857년생이므로 이때는 50대에 들어선 나이인데, 물론 더 오래 살 수도 있었겠지만 의학이 미비한 전근대시대인지라 얼마나 살았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나무위키 인용]

ⓒ hy인산인터넷신문
ⓒ hy인산인터넷신문
ⓒ hy인산인터넷신문

김윤국 기자 / 입력 : 2026년 04월 17일
- Copyrights ⓒhy인산인터넷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많이 본 뉴스 최신뉴스
거창군, 제6회 가족사진 공모전 개최..
【경남도의원】 국민의힘 함양군신청후보 정견발표회..
진병영함양군수 단수 공천 확정..
【서상천상제】 공기2577년 춘기석전대제 봉행..
함양 서하면 최일규 씨, 지역 인재 육성 위한 장학금 100만 원 기탁..
[기고] 농지 거래 절벽, 보이지 않는 장벽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범죄피해자지원센터 2026 정기총회 및 전문화교육..
“경남도 긴급 추경으로 민생 안정․신산업 육성 집중” 4,897억 원 규모 제1회 추경예산안 도의회 제출..
제25회 합천벚꽃마라톤, 1만 2천여 명 `벚꽃 레이스` 성료..
【 김재웅】함양군수출마예정자 기자회견..
포토뉴스
신문사소개 고충처리인제도 기사제보 제휴문의 광고문의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찾아오시는 길
제호 : hy인산인터넷신문 / 명칭 : 인터넷신문 / 등록번호 : 경남, 아02237 / 등록일 : 2016년 11월 24일
발행연월일 : 2016 12월 06일 / 발행인·편집인 : 김윤국 / Tel: 055-963-5008 / Fax : 055-963-5008
발행소 : 경남 함양군 함양읍 고운로 23, 2층(운림리) / 사업자등록증 : 477-10-00534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윤국 / mail: hyinsanews@daum.net
Copyright ⓒ hy인산인터넷신문 All Rights Reserved. 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
방문자수
어제 방문자 수 : 8,665
오늘 방문자 수 : 4,559
총 방문자 수 : 50,030,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