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추모식에서 내빈소개, 이원택위원장이 추도사, 진병영군수, 김윤택군의장, 김재웅도의원등이 추모사를 하고 기념사진 촬영후 맛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으며 환담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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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근산성 전투는 고려 우왕 6년(1380년) 함양군의 사근산성을 중심으로 왜구와 싸웠던 대표적인 전투로 박수경과 배언 장군을 비롯해 병사 500여 명이 전사하였다.
이에 사근산성 순국선열 추모위원회는 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후손에게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해마다 추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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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택 사근산성 추모위원장은 “사근산성 전투에서 장렬히 숨져간 선조들의 넋을 달래고자 예를 갖추어 제를 올리니 영령들께서는 평안한 마음으로 쉬시길 기원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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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영 군수는 추모사에서 “우리 함양이 충절의 고장으로 이름이 높은 것은 국가의 위기 속에서 의연히 몸을 받친 선조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 정신을 계승하여 살기 좋은 대한민국, 행복한 함양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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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근산성이 자리한 원평리에는 이전에 사근역원(沙斤驛院)이 있었기에 사근산성이라고 불린다. 산성은 해발 443m 연화산(蓮花山)의 능선을 돌로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연화산은 경상남도 산청에서 거창으로 향하는 3번국도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으로 통하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방면과 전북특별자치도 장수로 통하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방향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영남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에 입지하였을 뿐 아니라, 동 · 남 · 서쪽의 세 방향이 남강(南江)을 끼고 절벽을 이룬 천연의 요새로, 남해를 통해 호남의 곡창지대로 들어오는 왜구의 침입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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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덧붙여 아버지이신 인산김일훈선생님이 전해 주신 야사에 따르면 아지발도가 성난파도와 같이 쓸고 올라오면서 사근산성에서 5백여명의 군사를 물리치고 함양을 지나 팔령고개로 오르던 아지발도는 서리산으로 불리는 상산의 할머니 산신이 인사를 하러 오지 않는다고 불같이 화를 내며 상산을 파내어 평지를 만들겠다며 군대를 진군시키지 않자 부장이 말하길 고향을 떠나올 때 장군님의 누나가 말하길 함양지방의 서리산신을 건들지 말고 그냥 지나치라 했으니 지나가자고 하니 아지발도는 그렇다면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가는 길에 서리산을 자르고 가겠다고 하고 진군하여 운봉의 황산벌에서 이성계장군의 군대와 대치하여 전투를 몇차례 치렀으나 별다른 변화없이 밤을 맡았는데 그날 서리산의 할머니 산신이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아지발도는 온몸이 비늘로 덮인 물고기 후신이라 활이나 칼로는 죽일수 없을것이라며 아지발도를 크게 웃게 하여 그의 입을 활로 쏘게되면 죽일수 있다고 현몽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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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다음날 아지발도와 대치한 이성계장군은 아지발도에게 니가 천하의 영웅이라면 이세상이 떠나갈 듯이 웃어보라 하니 아지발도가 기분이 좋아져 천하의 영우이라도 된듯 크게 웃을때 이성계장군의 여진족출신 의형제인 퉁두란이지란에게 활을 쏘게하여 입에 여러발의 활을 맡고 쓰러지자 이성계장군이 몰아붙이자 죽은 아지발도를 끌고 인월로 향하는 골짜기 중간에 큰바위에서 고려군에게 아지발도의 목이 베어지고 수하들이 수없이 죽음을 당해 바위가 피로 붉게 물들어 지금도 그 바위는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어 피바위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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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기념하기 위해 전북 남원시 운봉읍 뜰 가운데 있는 황산마을 한켠에는 황산대첩과 사근산성등 여러 고을에서 순국한 원혼들을 달래기 위한 사당이 모셔져 제향을 모시고 있는데 일제세대에 허물었다가 해방후에 다시 세워져 그날의 황산대첩을 기리고 있다.
이렇게 고지도에도 표시되어있고 효험이 있는 서리산인 상산霜山이 지금은 오봉산으로 불리는데 아영방면에서 보면 봉우리가 다섯 개로 보인다고 아영사람들이 오봉산이라 부른다고 오봉산이라고 함양사람들도 부르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큰 연관이 산 이름을 버리고 옹뚱한 이름으로 부른다면 잘못된 일이니 원래의 이름인 서리산 상산霜山으로 고쳐 불러야 하진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사근산성은 큰 맥락으로 보면 이성계장군과 아지발도의 전투 선상에 놓여있어 피해를 입은 곳으로 오늘날까지 후손들이 이를 기리기 위해 사근산성 아래에 사당을 짓고 제향을 모시고 있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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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에 실린 이성계장군과 아지발도의 내용을 다시 읽어 드립니다
역사적 변천 산성은 1380년(우왕 6)에 영남지방을 휩쓴 왜구들에게 삼도원수 배극렴(裵克廉)과 감무 장군철(張群哲)이 혈전 끝에 함락된 뒤 조선 성종 때 보완하여 쌓았다고 한다. 그 뒤 왜구는 함양을 거쳐 단숨에 호남지방으로 진출하였다가 남원 인월역에서 이성계(李成桂)에게 격파되었다. 이 때에 박수경(朴修敬) · 배언(裵彦) 두 장수와 사졸 500여 명이 이곳에서 전사하여 냇물을 온통 피로 물들였다고 전한다. 이로써 보아,이 산성은 늦어도 고려 말에는 축성되어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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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동국여지승람』에는 “사근산성은 군의 동쪽 17리, 사근역 북쪽에 있다. 둘레가 2, 796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성 안에 못이 세 군데 있다”라고 하였으므로, 조선시대에도 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보다 오래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이곳이 신라와 백제 사이의 분쟁지역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산성을 처음 쌓은 때는 6세기 중엽까지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내용 성벽은 대부분 능선을 따라 바깥쪽 벽만에만 돌을 쌓는 편축(片築)의 방식으로 길고 네모난 돌을 ‘품(品)’자형으로 쌓았다. 다만 바닥 부분쪽에는 네모나거나 길고 네모난 다소 큰 돌을 쌓았던 반면, 위로 올라갈수록 얇고 길면서 네모난 돌과 두께가 넓은 돌을 일정한 규칙이 없이 번갈아 쌓기도 하였다. 아마도 여러 차례 보완하거나 고쳐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평열을 맞추기 위한 1열 축조, 2열 축조 기법도 여러 곳에 남아 있지만, 2열 축조 기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벽의 너비는 대체로 5m 내외이고, 최대 잔존 높이는 4.4m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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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발도(阿只抜都, 또는 阿其拔都, ? ~ 1380년)는 고려 우왕(禑王) 6년(1380년) 고려에 침입한 왜구(경신년 왜구)를 지휘했던 일본의 무장이다.
'아지발도'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고 고려측에서 부른 이름이며, 《용비어천가》에는 한글로 '아기바톨'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아지’는 한국어로 아기(어린아이)를 일컫는 말이고, ‘발도’는 몽골어로 용감무쌍(혹은 그러한 사람 즉 용사)하다는 의미의 '바토르'를 한자로 음차 표기한[1] 것으로 한국어와 몽골어의 합성어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아지발도와 관련한 남원 현지 전승에서는 '아이'의 전라도 방언인 '아구'(아그)를 써서 '아구바따'로 발음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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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쯤으로 여겨지던 어린 장수였으며, 뛰어난 무용으로 고려군을 겁먹게 하였으나, 이성계와 이두란이 쏜 화살을 맞고 사망하였다.
개요 우왕 6년(1380년) 고려를 침공한 '경신년 왜구'의 지휘관이었다는 것 이외에 아지발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아지발도라는 이름마저 그의 본명이 아니며, 아지발도라 불린 지휘관의 지배를 받는 왜구 군세와 교전했던 고려군이 부른 타칭만이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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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전투의 승리 이후 왜구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구출된 고려인의 증언이 《고려사》(高麗史) 변안열열전에 실려 있다. 증언에 따르면 아지발도는 섬(일본)에 있으면서 출정하려 하지 않았는데, 왜구들이 그의 무용(武勇)에 탄복해 지휘관으로 와 달라고 극구 간청하여 고려로 와 왜구를 지휘하게 되었던 것이라 적고 있다. 동시에 왜구의 무장들은 그를 보러 올 때마다 반드시 달려와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었으며, 부대 지휘의 전권이 그에게 있었던 점[3] 등으로 볼 때 신분이 높은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그의 무용에 대해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나이 겨우 십오륙 세 되는 적장 하나가 있었는데 용모가 수려하고 용맹스럽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면서 돌진해 오니, 그가 향하는 곳마다 (아군은) 쓰러져 감당하지 못했는데 아군이 '아기바톨'이라 부르며 다투어 피했다"고 되어 있다. 한편으로 아지발도 자신이 고려군에 이성계 등의 증원군이 가담한 것을 보고 "이번 군세는 지난번의 군진과는 다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평가했다는 언급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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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사전 참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고려 우왕 6년(1380년) 5백여 척 군세를 갖춘 왜구 선단은 진포(鎭浦, 충청남도 서천 및 전라북도 군산 앞바다)에 상륙하여 인근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타고 온 배는 진포에서 나세(羅世), 최무선(崔茂宣) 등이 이끄는 고려 수군의 화포(火砲) 공격에 모두 격침되었는데(진포 해전), 이때 살아남은 왜구는 옥주(沃州)로 달아나 이미 상륙했던 자들과 합세하였으며, 왜구는 이후 이산(利山) · 영동(永同)에 이어 황간(黃澗) · 어모(禦侮)를 공격해 불태우고 또한 중모(中牟) · 화령(化寧) · 공성(功城) · 청리(靑利) 등 고을을 침략, 상주(尙州)를 불태우고 이레를 머물면서 술판을 벌이고 다시 선주(善州)를 쳐서 불태우고 경산부(京山府)를 치며 남하해 갔다.
8월에는 함양(咸陽) 동쪽 사근역(沙斤驛, 사근내역)에서 고려군과 맞붙어 고려측 원수 박수경(朴修敬), 배언(裵彦) 및 고려군 5백 명이 전사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때 인근 냇물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인근 주민들이 그곳을 피내(血溪, 경남 함양군 수동면 죽산리에서 분덕 앞으로 흐르는 죽산천)라 불렀다고 한다.[5] 9월에는 남원(南原)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운봉의 인월역(引月驛)에 진을 치고 다시금 남원을 포위했다. 이때 아지발도는 "광주(光州)의 금성(金城)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겠다"(《역대병요》)고까지 호언할 정도로 여전히 기세가 등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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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정은 이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을 인물로 이성계를 발탁해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로 임명하고, 도체찰사(都體察使) 변안열 및 왕복명(王福命) · 우인열(禹仁烈) · 도길부(都吉敷) · 박임종(朴林宗) · 홍인계(洪仁桂) · 임성미(林成味) 그리고 이원계(李元桂)가 남원에 도착했다. 이성계는 하루 동안 말을 쉬게 한 뒤 곧장 다음날 동쪽으로 운봉(雲峯)을 넘어서 왜구의 진과 수십 리 떨어진 황산(荒山) 서북쪽 정산봉(鼎山峯)에 올랐다. 《고려사》는 이성계가 정산봉으로 가는 길 오른쪽의 험한 길을 보고 적이 분명히 이 길로 후방을 공격할 것이라며 그 길을 택해 진군하였는데, 날이 저물 무렵 왜구의 기병이 이성계의 군을 기습해 왔고 양측은 세 번을 충돌하였다고 적었다. 산에 웅거하며 농성에 들어간 왜구를 상대로 이성계는 군사들을 요해처에 배치, 왜구들을 도발해 전장으로 끌어냈으며, 전투는 혼전이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전투 와중 이성계가 탄 말이 왜구의 화살에 맞아 쓰러지느라 말을 갈아 타야 했고, 이성계 자신도 날아온 화살에 왼편 다리가 맞았을 정도로 왜구의 저항은 매우 격렬하였다고 한다. 아지발도가 고려군 앞에 직접 등장해 전투를 벌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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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용맹하고 날쌘 모습을 가상히 여겨 으재퉁두란에게 생포할 것을 명했지만, 이지란이 "생포하자면 반드시 사람이 다칠 것이다. 그 사람은 면상에까지 갑옷을 둘러서 활을 쏠 만한 틈도 없다"[6]며 반대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내가 그의 투구의 꼭지를 쏘아 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곧 쏘아라."고 하고는 말을 달려나가며 쏘아 투구 꼭지를 맞혔다. 투구 끈이 끊어져 기울어지자 아지발도는 급히 바로 썼지만, 이성계가 다시 쏜 화살에 투구가 떨어지고, 뒤이어 이지란이 쏘아 죽였다.
대장을 잃은 왜구는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져 산 위로 달아났고, 고려군은 산으로 쫓아 올라가 왜구들을 공격해 격파하였다. 이때 강물이 피로 물들어 6, 7일이나 붉은 빛이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군이 전리품으로 얻은 것은 1,600필을 헤아리는 말이었으며, 고려군에게 대부분의 왜구 잔병이 죽임을 당하고 지리산(智異山)까지 달아난 왜구는 70명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황산대첩).
피바위 전승과 지리산 산신 조선 중기 문인 장유(張維)의 문집 《계곡집》(谿谷集)이나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운봉현 동쪽 10리 지점에 황산(荒山)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 위에 있는 사방 몇 장이 되고 보랏빛으로 피가 스민 듯한 빛이 도는 큰 바위가, 당시 아지발도가 이성계의 화살에 맞고 흘린 피가 스며든 곳이었다는 전승을 전하고 있는데[7] 지금의 남원시 인월면의 남천 강변에 남아 있는 피바위가 그것이다. 피바위에 대해 남원 현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승이 전해진다. 개요 우왕 6년(1380년) 고려를 침공한 '경신년 왜구'의 지휘관이었다는 것 이외에 아지발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아지발도라는 이름마저 그의 본명이 아니며, 아지발도라 불린 지휘관의 지배를 받는 왜구 군세와 교전했던 고려군이 부른 타칭만이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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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전투의 승리 이후 왜구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구출된 고려인의 증언이 《고려사》(高麗史) 변안열열전에 실려 있다. 증언에 따르면 아지발도는 섬(일본)에 있으면서 출정하려 하지 않았는데, 왜구들이 그의 무용(武勇)에 탄복해 지휘관으로 와 달라고 극구 간청하여 고려로 와 왜구를 지휘하게 되었던 것이라 적고 있다. 동시에 왜구의 무장들은 그를 보러 올 때마다 반드시 달려와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었으며, 부대 지휘의 전권이 그에게 있었던 점[3] 등으로 볼 때 신분이 높은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그의 무용에 대해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나이 겨우 십오륙 세 되는 적장 하나가 있었는데 용모가 수려하고 용맹스럽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면서 돌진해 오니, 그가 향하는 곳마다 (아군은) 쓰러져 감당하지 못했는데 아군이 '아기바톨'이라 부르며 다투어 피했다"고 되어 있다. 한편으로 아지발도 자신이 고려군에 이성계 등의 증원군이 가담한 것을 보고 "이번 군세는 지난번의 군진과는 다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평가했다는 언급도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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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사전 참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고려 우왕 6년(1380년) 5백여 척 군세를 갖춘 왜구 선단은 진포(鎭浦, 충청남도 서천 및 전라북도 군산 앞바다)에 상륙하여 인근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타고 온 배는 진포에서 나세(羅世), 최무선(崔茂宣) 등이 이끄는 고려 수군의 화포(火砲) 공격에 모두 격침되었는데(진포 해전), 이때 살아남은 왜구는 옥주(沃州)로 달아나 이미 상륙했던 자들과 합세하였으며, 왜구는 이후 이산(利山) · 영동(永同)에 이어 황간(黃澗) · 어모(禦侮)를 공격해 불태우고 또한 중모(中牟) · 화령(化寧) · 공성(功城) · 청리(靑利) 등 고을을 침략, 상주(尙州)를 불태우고 이레를 머물면서 술판을 벌이고 다시 선주(善州)를 쳐서 불태우고 경산부(京山府)를 치며 남하해 갔다.
8월에는 함양(咸陽) 동쪽 사근역(沙斤驛, 사근내역)에서 고려군과 맞붙어 고려측 원수 박수경(朴修敬), 배언(裵彦) 및 고려군 5백 명이 전사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때 인근 냇물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인근 주민들이 그곳을 피내(血溪, 경남 함양군 수동면 죽산리에서 분덕 앞으로 흐르는 죽산천)라 불렀다고 한다.[5] 9월에는 남원(南原)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운봉의 인월역(引月驛)에 진을 치고 다시금 남원을 포위했다. 이때 아지발도는 "광주(光州)의 금성(金城)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겠다"(《역대병요》)고까지 호언할 정도로 여전히 기세가 등등했다.
고려 조정은 이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을 인물로 이성계를 발탁해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로 임명하고, 도체찰사(都體察使) 변안열 및 왕복명(王福命) · 우인열(禹仁烈) · 도길부(都吉敷) · 박임종(朴林宗) · 홍인계(洪仁桂) · 임성미(林成味) 그리고 이원계(李元桂)가 남원에 도착했다. 이성계는 하루 동안 말을 쉬게 한 뒤 곧장 다음날 동쪽으로 운봉(雲峯)을 넘어서 왜구의 진과 수십 리 떨어진 황산(荒山) 서북쪽 정산봉(鼎山峯)에 올랐다. 《고려사》는 이성계가 정산봉으로 가는 길 오른쪽의 험한 길을 보고 적이 분명히 이 길로 후방을 공격할 것이라며 그 길을 택해 진군하였는데, 날이 저물 무렵 왜구의 기병이 이성계의 군을 기습해 왔고 양측은 세 번을 충돌하였다고 적었다. 산에 웅거하며 농성에 들어간 왜구를 상대로 이성계는 군사들을 요해처에 배치, 왜구들을 도발해 전장으로 끌어냈으며, 전투는 혼전이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전투 와중 이성계가 탄 말이 왜구의 화살에 맞아 쓰러지느라 말을 갈아 타야 했고, 이성계 자신도 날아온 화살에 왼편 다리가 맞았을 정도로 왜구의 저항은 매우 격렬하였다고 한다. 아지발도가 고려군 앞에 직접 등장해 전투를 벌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
당시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용맹하고 날쌘 모습을 가상히 여겨 으재퉁두란에게 생포할 것을 명했지만, 이지란이 "생포하자면 반드시 사람이 다칠 것이다. 그 사람은 면상에까지 갑옷을 둘러서 활을 쏠 만한 틈도 없다"[6]며 반대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내가 그의 투구의 꼭지를 쏘아 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곧 쏘아라."고 하고는 말을 달려나가며 쏘아 투구 꼭지를 맞혔다. 투구 끈이 끊어져 기울어지자 아지발도는 급히 바로 썼지만, 이성계가 다시 쏜 화살에 투구가 떨어지고, 뒤이어 이지란이 쏘아 죽였다.
대장을 잃은 왜구는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져 산 위로 달아났고, 고려군은 산으로 쫓아 올라가 왜구들을 공격해 격파하였다. 이때 강물이 피로 물들어 6, 7일이나 붉은 빛이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군이 전리품으로 얻은 것은 1,600필을 헤아리는 말이었으며, 고려군에게 대부분의 왜구 잔병이 죽임을 당하고 지리산(智異山)까지 달아난 왜구는 70명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황산대첩).
피바위 전승과 지리산 산신 조선 중기 문인 장유(張維)의 문집 《계곡집》(谿谷集)이나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운봉현 동쪽 10리 지점에 황산(荒山)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 위에 있는 사방 몇 장이 되고 보랏빛으로 피가 스민 듯한 빛이 도는 큰 바위가, 당시 아지발도가 이성계의 화살에 맞고 흘린 피가 스며든 곳이었다는 전승을 전하고 있는데[7] 지금의 남원시 인월면의 남천 강변에 남아 있는 피바위가 그것이다. 피바위에 대해 남원 현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승이 전해진다. 왜구의 노략질이 잦아지자 우왕은 북쪽에서 국경을 방어하고 있던 이성계 장군을 정왜원수(征倭元帥)로 삼아 남원 운봉에 급파하였다. 나라의 명을 받은 이성계 장군은 활 잘 쏘는 병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달려와서 운봉 황산에 진을 치고 왜병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아지발도가 16세의 어린 소년 대장으로 고려를 치러 가려는데, 이를 들은 아지발도의 누이가 간곡하게 말리며 "정 고려에 가거든 부디 황산(荒山)을 조심해야 한다. 그곳에서 너는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주 1] 아지발도는 누이의 말에 오히려 성을 내며 "장부가 출정하는데 누님은 그 무슨 요망한 언사요? 황산이고 뭐고 내가 가는 곳에 무슨 대적이 있겠소?"라며 누이를 죽이고 출정했다.
하지만 남해안으로 상륙해 마산, 진주 등의 평야로 진격하다가 하늘에 높이 솟은 지리산을 보고 산의 험준한 기운에 정신이 짓눌리는 느낌을 받은 아지발도는 마음 한켠에 꺼림칙하게 남아있던 "황산을 조심하라. 너는 그곳에서 죽는다"라던 누이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행군하던 길에 어느 노파가 짤막한 쇠막대기를 짚고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본 아지발도는 나이 많은 현지 주민이니 지형, 지세, 지명에 대해 잘 알 것이라 생각하고 행군을 잠시 멈추고 "여보시오 할멈, 고려에 황산이란 산이 어디에 있소?"라고 물었는데, 노파는 아지발도를 흘낏 보더니 쇠막대기로 산천 왕산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산이 왕산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 쇠막대기가 이렇게 닳도록 팔도강산을 주름잡고 다녔어도 황산이 있다는 말은 오늘 들은 게 처음이요"라고 대답했다.
아지발도는 그 말을 듣고 오래 고민하던 수수께끼가 풀린 듯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군사들을 재촉하여 함양을 불사르고 팔량치를 넘어 운봉까지 진군했지만, 그곳이 황산일 줄은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지란이 쏜 화살에 투구를 맞고 "바람이 세기는 세구나"라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는데, 그 순간에 이성계의 화살에 입이 꿰뚫려 쓰러졌다.
그때 아지발도가 쏟아낸 피가 바위 위에 남아 후세에 피바위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이때 아지발도가 만났던 노파 즉 노구는 사실은 지리산의 산신인 노고였다는 것이다.[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