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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명성당에 모인 헌관들과 유림, 내빈들이 상읍하고 진병영군수와 배우진군의회부의장이 잠시 들러 인사말을 한후 명성당 뒤 사당에서 점촉, 개독, 분향하는 전폐례를 올리고 술을 받아 술을 조금 처서 모사위에 세번에 나누어 붓고 젯상에 올리고 강신후 일동재배하는
참신례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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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초헌관 권충현초헌관이 첫 잔을 올리는 초헌례를 올리고
노상민대축이 축문낭독후 초헌관이 재배하는 초헌례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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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이영재이사가 아헌관이 되어 헌작, 재배하는 아헌례를
올리고 종헌관 정현기이사가 헌작, 재배하는 종헌례를 올리는데
헌관들이 모두 일두 정여창선생 신위와, 개암 강익선생 신위,
동계 정온선생 신위등에 순서대로 제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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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초헌관이 제주와 안주를 먹는 음복례를 하고 지방과
축문을 태우는 망료례를 하면서 제향을 마치고 자리를 명성당으로
옮겨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종친대표, 이창구남계서원원장등이 강평례를 한후
맛있는 밥을 나눠먹으며 선조들의 덕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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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남계서원은 1552년(명종 7년) 개암(介庵) 강익(姜翼)에 의해 ‘남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도심(道心) 회복(유학 교육)’과 ‘일두(一蠹) 정여창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창건되었다. 1566년(명종 21년)에 ‘남계(蘫溪)’라는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정유재란(1597년)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603년(선조 36년)에 나촌으로 옮겼다가, 1612년(광해군 4년)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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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은 경사의 지형 조건을 활용하여 앞쪽은 강학공간, 뒤쪽은 제향공간이라는 전학후묘(前學後廟) 서원의 독창적 건축 배치형식의 기준을 마련하였고, 이후 건립되는 서원들의 전형이 되었다. 함양 남계서원은 1868년(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아있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며 경남 유일의 존속서원이다.
함양 남계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2019년 등재되었다.(남계서원제공)」
정여창
정여창(1450~1504)은 남계서원 서북쪽에 위치한 함양 개평리에서 태어났으며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그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젊은 시절부터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정여창은 성균관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고, 이후 지리산 아래 섬진나루에 은거하였다. 한때는 세자의 스승이 되어 연산군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문인들이 무려 2달에 걸쳐 함양까지 옮겨와 남계서원 뒤 승안산 기슭에안장하였다. 정여창은 1610년(광해군 2년) 문묘*에 종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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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강익
강익(1523~1567)은 함양 수동 효리(효우촌)에서 태어났다. 15세에 학문을 시작하였으며 당곡 정희보와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학문을 시작한지 10여 년 후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눈을 뜬 그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도심(道心) 회복과 사문흥기(斯文興起) 창명유교(倡明儒敎)’의 실현을 위해 45세 일생을 바쳐서 남계서원 창건에 진력했다. 남계서원 초대원장(1561년)이 되었으며 1689년(숙종 15년)에 남계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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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정온
정온(1569~1641)은 함양 출신으로 15세 때에 처음으로 임훈을 찾아가 제자가 되어 학업에 정진하였으며 늦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중요한 직책을 맡으며 정계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고,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까지 인조를 호종하였다. 그러나 인조가 항복하자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자결을 시도하였으며, 이 또한 실패하자 향리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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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2년 (명종 7년) 도심회복과 일두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개암 강익(姜翼)의 주도하에 박승임(朴承任), 정복현(鄭復顯), 임희무(林希茂), 노관(盧祼)과 함께 창립 협의
1559년 (명종 14년) 군수 윤확(尹確)과 함양, 거창, 안음의 지방관 및 사림의 기부로 강당 건립 완성
1561년 (명종 16년) 묘우 건립 완성 / 정여창의 위패 봉안(2월 16일)
1566년 (명종 21년) 관찰사 강사상(姜士尙)을 통해 중앙에 사액 요청(6월) / 서원 앞에 흐르는 시내의 이름을 따서 “남계(灆溪)”라 사액(7월)
1597년 (선조 30년) 정유재란으로 남계서원 소실, 정경운(鄭慶雲) 등이 위패 매안(埋安)
1605년 (선조 38년) 나촌(羅村)으로 남계서원 이건(移建), 위패 모심
1612년 (광해군 4년) 남계서원을 현 위치로 이건(移建)
1634년 (인조 12년) 남계서원에 별묘를 건립, 강익의 위패를 별묘에 이안
1642년 (인조 20년) 유호인, 정온을 별묘에 배향
1677년 (숙종 3년) 정온을 별묘에서 본사로 숭배
1686년 (숙종 12년) 남계서원에서 강익의 문집 『개암집(介庵集)』 개간(開刊)
1689년 (숙종 15년) 강익을 별묘에서 본사로 숭배
1868년 (고종 5년) 서원철폐령, 남계서원은 존립, 별묘 훼철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
2009년 5월 26일 사적 제499호로 승격 지정됨(지정면적 4,810㎡)
2019년 7월 10일 •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
남계서원(경남 함양), 소수서원(경북 영주), 도산서원(경북 안동),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필암서원(전남 장성),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조선 명종 7년(1552)에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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