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4353년
중국 간쑤성 북부에 있는 돈황시 동남쪽 25km에 위치한 명사산 동쪽 벼랑에 막고굴은
남북으로 1.600km에 걸쳐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신라의 고승 혜초스님의 인도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이 보관 되었던 곳이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남다른 감회가 깊은 곳이다.
인도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1908년에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중국 간쑤성의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되어 고대의 동서 교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왕오천축국전의 발견 일화를 살펴보면 사실 펠리오 남들도보다 늦게 돈황에 도착하여 영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물을 다 가져간뒤 도착하여 아무리 찾아 봐도 보물이 없었다.
막고굴을 돌아 다니며 보물을 찾아 헤메던 펠리오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한 벽에 기대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담배 연기가 갈라진 벽 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 벽을 허물었더니
큰 공강이 나오고 거기에는 예전의 문서들과 보물들이 대량으로 나오자 모두 쓸어 담아서
프랑스로 밀반출했다고 한다.
현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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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김윤국 |
| ⓒ hy인산인터넷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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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김윤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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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의 동남쪽 25km에 위치한 밍사 산(명사산) 동쪽 벼랑에 남북으로 1,600m에 걸쳐 조성된 막고굴과 서천불동, 안서유림굴, 수협구굴 등 600여 개의 동굴이 있고, 그 안에 2400여 개의 불상이 안치되고 있다.
벽 한 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고, 총 면적은 45,000km2이다. 둔황 석굴, 둔황 천불동이라고도 하며, 막고굴이라는 것이 광의의 의미에서는 전부를 포함하기 때문에 간단히 막고굴이라고 한다.
막고굴이 만들어진 시기는 오호 십육국 시대 전진(前秦)의 지배하에 있던 355년 또는 366년으로 추정되며, 승려 낙준이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한 것을 시작으로, 그 후 법양에서 원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1,000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굴은 5세기 전반에 여기를 지배한 북양의 것으로 그 이전의 것은 후세에 새롭게 굴을 파면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막고굴의 북부는 장인의 주거지로서 이곳에는 불상과 벽화가 없다. 벽화의 양식으로서는 5호 16국 시대 북양과 계속된 북위 때에는 서역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며, 제작된 불전, 천불 등이 그 영향을 그대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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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인산인터넷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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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주와 수당에 이르면서 중국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석가설법도 등도 이때 그려지게 된다. 통치 기간이 가장 긴 당나라 때의 석굴이 225개 굴로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수나라가 97개를 차지한다.
북송 때 서하 지배하에 들면서, 둔황의 가치가 하락하여, 점차 그 수가 적어지고 서하 때의 것은 20개, 원나라 때 석굴이 7개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몽골의 침입과 이슬람의 침입을 거치면서, 둔황은 완전한 쇠퇴해진 도시가 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막고굴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이 막고굴이 다시 한번 주목을 받은 것은, 1900년, 둔황의 문헌이 장경동에서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발견 이후에도 막고굴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그 가치가 인정되고, 보호가 시작된 것은 1945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1965년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왔지만, 문화재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우언라이의 은밀한 보호지시로 추가로 파괴되는 봉변은 피하게 되었다.
혜초스님은 왕오천축국전에서 5개의 오언 율시를 남겼다.
나의 마음을 간단히 적다 (略題述其愚志 약제술기우지) 깨달음이 멀다고 걱정 않는데 어찌 녹야원[2]이 그리 멀다 하리오 가파른 길 험하다고 근심할 뿐 업풍(業風)[3]이 몰아쳐도 개의치 않네 여덟 탑[4]을 보기란 정말 어려운데 오랜 세월 겪으며 거의 타버렸으니 어찌 뵈려는 소원 이루어지겠는가
(하지만) 바로 이 아침 내 눈으로 보았노라. 不慮菩提遠 불려보리원 焉將鹿苑遙 언장녹원요 只愁懸路險 지수현로험 非意業風飄 비의업풍표 八塔難誠見 팔탑난성견 參著經劫燒 참착경겁소 何其人願滿 하기인원만 目覩在今朝 목도재금조 * 힘들게 도착하여 석가모니의 성지를 바라봄에 뿌듯한 감회를 서술.
남천축국 길에서 (在南天路재남천로) 달밤에 고향 가는 길 바라 보니 뜬 구름 휙휙 돌아나가네 그 편으로 서신을 붙이고자 하나 급한 바람은 듣지도 않고 돌아가 버리누나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의 구석 서쪽에 있는데, 일남(日南)[5]에는 기러기가 있지 않으니 누가 계림[6]을 향하여 날개짓을 하오리.
月夜瞻鄕路 월야첨향로 浮雲颯颯歸 부운삽삽귀 緘書參去便 함서참거편 風急不聽廻 풍급불청회 我國天岸北 아국천안북 他邦地角西 타방지각서 日南無有雁 일남무유안 誰爲向林飛 수위향림비 * 베트남에서 달밤에 달에 비치는 구름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함.
저승길을 슬퍼하다 (悲冥路비명로) 고향의 등불은 주인을 잃어 타향에서 보배로운 나무가 꺾어져 버렸도다.[7] 신성한 영혼은 어디로 가버렸기에 옥 같던 모습은 이미 재가 되었는가? 잊지 못하고 그리워서 슬픈 감정 간절하지만 그대 소원을 따르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오. 고향으로 가는 길 누가 알고 있는지
흰 구름 돌아감을 헛되게 바라본다.
故里燈無主 고리등무주
他方寶樹摧 타방보수최 神靈去何處 신령거하처 玉貌已成灰 옥모이성회 憶想哀情切 억상애정절 悲君願不隨 비군원불수 孰知鄕國路 숙지향국로 空見白雲歸 공견백운귀 * 같이 여행을 한 동료가 타지에서 죽어, 깊이 슬퍼함.
서역으로 들어가는 한나라[8] 사신을 만나 간단히 운[9]을 취해 짓다 (逢漢使入蕃略題四韻取辭봉한사입번약제사운취사) 그대는 서역이 멀다고 한탄하고 나는 동쪽 길이 멀다고 탄식한다. 길은 거칠고 고개에 엄청난 눈 쌓였는데 험한 산골엔 도적떼가 날뛰는구나 새는 날다가 가파른 산 높이에 놀라고 사람은 굽은 나무 의지하며 어렵사리 넘어가노니 평생 눈물을 흘리지 않았건만
오늘은 하염없이 떨어지누나. 君恨西蕃遠 군한서번원 余嗟東路長 여차동로장 道荒宏雪嶺 도황굉설령 險澗賊途倡 험간적도창 鳥飛驚峭嶷 조비경초억 人去難偏樑 인거난편량 平生不捫淚 평생불문루 今日灑千行 금일쇄천항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역으로 가는 사신을 만나서, 귀향 하기 힘듬을 토로하고 북받쳐 눈물을 흘림.
겨울에 토화라[10]에서 눈을 만나 마음에 품은 말을 적다 (冬日在吐火羅逢雪述懷동일재토화라봉설술회) 서늘한 눈, 얼음에 붙어 합하고
차가운 바람, 땅을 쪼갤 듯 사납다.
큰 바다는 얼어서 단(壇)을 이루고 강물은 벼랑을 물어 뜯는다 용문에 폭포는 끊어지고 우물은 똬리 튼 뱀, 엉켰나니 불에 의지해 계단 오르며 노래하도다
어떡하면 파미르[12]를 넘어갈 수 있는가 冷雪牽氷合 냉설견빙합 寒風擘地烈 한풍벽지열 巨海東墁壇 거해동만단 江河凌崖囓 강하릉애설 龍門絶瀑布 용문절폭포 井口盤蛇結 정구반사결 伴火上陔歌 반화상해가 焉能度播蜜 언능도파밀 * 파미르 고원의 상상하지도 못할 추위에 놀라며, 노래를 부르며 나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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