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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군,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월파 유팽로 유적 새 단장

- 월파 유팽로, 금산성 전투 이끌며 이순신 수군의 전세 역전 발판 마련 -
- 2015년부터 유적 정비 착수해 3년 만에 준공, 역사 배움터 역할 기대 -

김철상 기자 / 입력 : 2019년 07월 07일
단기4352년 서기2019년

지난 3일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에서 유족과 곡성군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월파 유팽로 유적 정비 사업 준공식이 열렸다.

일본정부가 한국 법원의 강제징용 손해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조치의 일환으로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의 한국수출 규제에 나선 이 시점에서 임진왜란 의병장의 유적정비 사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월파(月坡) 유팽로(柳彭老) 의병장은 1554년 지금의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에서 출생했다. 1579년(선조 12)에는 진사시 입격하고, 1588년(선조 21)에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항전하다 금산성전투에서 전사한 호남의 의병장이다.

고경명, 김천일과 함께 호남 삼창의(湖南三昌義)로 불러졌으나, 슬하에 자녀가 없었고, 부인 또한 의병장을 따라 자결함으로써 후손이 없어 그 동안 관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곡성군(군수 유근기)에서 2015년에 유적 정비사업을 착수해 이날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 hy인산인터넷신문

의병장 유팽로는 성균관 학유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했다. 서울을 떠나 고향 곡성으로 향하던 중 1592년 4월 20일 순창의 대동산 앞들에서 5백여 명의 군사들을 규합하여 ‘전라도의병진동장군유팽로(全羅道義兵鎭東將軍柳彭老)’라 쓴 대청기(大靑旗)를 세웠다. 이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봉기로 알려진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 장군보다 2일 앞서 기병한 것으로 임란 최초 의병이라는 점에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에는 무명 37인과 함께 펼쳤던 임진년 5월 11일의 임실 갈담역(任實 曷潭驛) 전투가 확인된다. 유팽로 의병군이 거둔 최초의 승전보는 임진왜란사 중 전국 최초의 의병 승전사라고 육군사군학교에서 평가한 바 있다.

의병장 유팽로는 자신의 휘하에 모여든 천여 명의 의병들에게 지급할 군복과 군량, 군기를 미리 비축하여 놓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민심의 안정을 통해 지역민들의 적극적 협조와 인력, 물자를 무난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다.

유팽로의 의병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양대박(梁大樸)과 안영(安瑛)의 만남은 고경명 장군의 호남연합의병군 형성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월파 유팽로가 담양에 모여 안영, 양대박과 함께 고경명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좌부장 유팽로, 우부장 양대박, 종사관 안영 등을 주축으로 6천여 명의 의병군을 오행진으로 편성했다.

호남연합의병은 근왕상병을 주창하며 한양으로 진격하던 중 호남지역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왜군을 만나 금산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첫날의 공격은 승전에 가까웠다. 하지만 둘째 날 월파 유팽로가 선봉장을 맡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으나, 연합전선을 편 관군이 무너지면서 의병 또한 무너지게 된다. 혈전을 거듭하면서 적진을 탈출하였으나, 고경명 장군이 적진에 있음을 알고 그를 구하고자 다시 들어갔다. 결국 고경명을 치려는 적장의 칼을 유팽로 장군이 대신 받음으로써 향년 39세의 나이로 순절하게 된다.

의병장 유팽로는 “요새를 나누어 점거하고 적이 태만해지기를 기다려 정예병을 선발하여 공격하자.”는 전략을 내 놓았으나 전면 공격으로 의견이 모아져 일전을 벌였다고 한다. 만약 월파의 전략이 받아 들여졌다면 금산전투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금산전투는 호남연합의병인 담양회맹군의 미완의 거사로 끝을 맺었다. 주장으로 추대한 고경명 장군의 지휘 하에 옥과의 월파 유팽로, 남원출생이자 곡성 청계동에서 의병훈련을 했던 청계 양대박과 안영이 주축이 되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종사촌 간이었던 월파와 양대박의 회동은 담양회맹의 시기를 훨씬 앞당겨 주었고 그 규모면에서나 다른 사림(士林)들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이렇듯 유팽로 의병장은 임란으로 침체되고 동요하던 지역 민심을 수습하였고 각 지역에 창의격문을 보내 거병 의기를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전라도 의병 회맹을 이끌어 낸 중심인물이었다. 담양회맹 후에는 의병진내에서 실무적인 역할을 주도하였고 금산 전투의 선봉장으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충의를 지키며 죽음을 맞이했다.

특히 금산 전투는 왜군의 전주 침입을 저지하여 전라도를 보존하고, 이순신의 수군이 활동할 수 있는 호남을 지켜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제1차 금산 전투가 벌어졌던 7월 이후 10월에 이르는 동안 호남 지방의 의병 항쟁은 절정기를 이루었다. 이 무렵 의병 지도자들은 대부분 고경명 부대로 불리는 담양회맹군과 관계가 있거나 혹은 그 영향을 받은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성과 장흥에서는 박광전, 임계영을 중심으로 한 전라 좌의병이 일어났고, 광주에서는 화순의 최경회을 중심으로 전라 우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밖에도 영광의 심우신 등이 일으킨 20여 개의 전라도 의병 부대가 생겨났다.

유팽로의 유고집인 『월파집』이 전해지는데 3권 1책으로 되어 있다. 1권에는 시와 상소, 격문이 실려 있고, 2권은 유가설, 병가설, 농가설의 설(說)과 배이단, 억분경, 금포저, 복제문집서문, 후조당기의 잡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3권은 1592년 4월 2일부터 그가 금산성 전투에서 사망한 7월 10일까지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유팽로 관련 유적으로는 고향인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에 정렬각, 도산사와 의마총 등이 있다. 현재 광주 포충사, 충남 금산 종용당, 옥과(겸면)영귀서원, 옥산사, 도산사에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이날 준공식에서 유근기 곡성군수는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유팽로 의병장의 유적을 정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올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온 선열들의 뜻을 길이 받들고 후손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김철상 기자 / 입력 : 2019년 07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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